날이 어둑어둑했다. 준섭은 올려다본 하늘이 거무죽죽한 색인 걸 보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우산을 가져왔던가? 급하게 가방을 열어 찾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우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산도 없는데 비가 왕창 쏟아지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겠네. 비가 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준섭은 느긋하던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바꾸었다. 급히 빠릿해진 움직임에 종아리쪽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알이 배겼나. 하기야, 무리도 아니지. 요 근래의 운동량을 생각하며 준섭은 쓰게 웃었다.
“다리도 아픈데, 비까지 오면 슬프겠다아….”
그리고 정말 슬프게도 준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아, 너무해. 그다지 믿지 않는 하나님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준섭은 매고 있던 가방을 두 손에 들고 머리를 가린 채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젖는 건 정말 질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앞도 제대로 보지않고 무작정 뛰었던 탓인지, 전혀 모르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이런. 준섭은 낭패어린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쏟아진 주제에 빗줄기까지 굵어 준섭의 옷은 몸은 옷이요, 옷은 몸이요. 라고 착각할 정도로 젖어서 몸에 찰싹 붙어있었고 게다가 바람까지 거세져 온 몸이 차갑게 식고 있었다.
“에고, 추워…. 어쩌지.”
감기라도 걸리면…. 원체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라 한번 병에 걸리면 꽤 오래 붙잡혀 있는 체질이라 감기도 큰일이었다. 겨울 선발전이 얼마나 남았다고. 화를 낼 정환이형의 얼굴이 그려지고 거기에 자체 음성 지원까지…. 으으. 너무 무서워. 준섭은 질색하며 택시를 타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감기에 걸려 정환이형에게 혼나는 것보단 돈이 들더라도 택시를 타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지갑이…….”
분명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다. 어라? 어라라? 준섭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옷의 모든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지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가방을 뒤져보았지만 이럴수가. 가방에도 없었다. 이제 준섭은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어쩌지? 더 이상은 선택지가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주저앉아 울고 싶어! 라고 생각하며 준섭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 근처 건물에라도 들어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가 정말 감기가 아닌 독감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던 준섭은 갑자기 비가 그쳤다는 걸 깨닫고 땅 쪽을 향해 있던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비가 그친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우산을 씌어준 것이었다.
“어…아…!”
시선을 올린 준섭은 시선 끝에 닿은 사람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살풋 웃었다. 시선에 닿은 사람은 뭐라도 불만이 있는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북산고의 슈팅가드, 정대만이었다. 운동이라도 하고 오는 길이었는지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는 자신이 쓰고 있던 노란 우산을 준섭에게 씌어준 것이었다. 뚱한 표정 뒤로 배경마냥 깔린 노란 우산이 귀여워서 준섭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꼭 화난 병아리 같아. 상대방이 들으면 분명 노발대발할 생각을 하며 준섭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 감사합니다.”
“해남 녀석이 왜 여기까지 와있어?”
“그게 비를 피하려고 정신없이 뛰다보니…하하, 너무 한심하게 쳐다보진 말아주세요.”
한심한 건 사실이잖아, 라는 말은 삼키며 대만은 상대의 얼굴서 시선을 거두어 조금 밑으로 시선을 깔았다. 푹 젖은 옷이 말이 아니었다. 옷하고 일심동체라고 해도 믿겠군. 혀를 쯧, 하고 차며 대만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어주었다.
“…?”
“입어, 좀 있음 추워서 죽겠다.”
“아, 하지만 대만선배 쪽도…”
“괜찮아, 난 젖진 않았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후드집업을 벗은 정대만은 얇은 여름 반팔 한 장만을 걸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추울 게 분명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우물쭈물 하는 준섭을 가만히 쳐다보던 대만은 들고 있던 후드집업을 휙 준섭에게 던졌다. 던져진 후드집업은 퍽, 하고 준섭의 얼굴을 가격한 뒤 땅으로 추락하다가 놀란 준섭에 의해 구해졌다. 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잡은 후드집업을 엉성하게 걸치는 준섭을 보며 대만은 피식 웃었다. 짜식이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집엔 어떻게 갈라고?”
“응,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지갑이 없어서….”
“집에 전화하면 되잖아. 가지고 나오라고 하면 되는 거 아냐?”
“핸드폰이 망가져서….”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준섭을 바라보며 대만은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어떡하면 이렇게 재수 없을 수 있지? 자신도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녀석보다는 나았다. 불쌍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대만은 제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가벼운 산책 겸 나왔던 터라 지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지. 이대로 돌려보내기엔 마음이 찜찜해 대만은 끙,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전 괜찮아요. 어떻게든 갈 테니까….”
“…어떻게든 어떻게 갈건데?”
“…아하하하하. 그건 좀 차차 생각해 봐야겠네요.”
나랑 장난 치냐. 대만은 더욱 얼굴을 찌푸리며 준섭을 쳐다보았고, 준섭은 그런 대만의 시선을 피하며 아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그렇게 서있던 두 남자 사이로 부는 바람이 찼다. 어디든 들어가서 몸을 녹이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대만은 급한데로 제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집에 들여본 적은 없었지만 (친한 녀석들도 집에는 거의 와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준섭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아직 엄마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며 대만은 깜깜한 집의 등을 모조리 다 켰다. (이건 그의 버릇이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준섭이 정대만 자신이 엉망으로 벗어놓은 운동화까지 가지런히 놓는 걸 보며 그는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곤 거실에 준섭을 덩그러니 놔두고 제 방으로 휙 들어갔다.
“저, 대만선…배…?”
그런 그의 행동에 준섭은 당연히 당황하고 있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집에까지 와버렸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거실에 버려두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어쩌면 좋지. 옷이 젖어 어디 앉을 수도 없어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거실을 왔다갔다 거리며 불안해하던 준섭의 얼굴에 갑작스레 수건이 던져진 건, 대만이 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일단 그걸로 닦고, 이걸로 갈아입어.”
수건을 던지며 방에서 나온 대만은 자신이 잘 안 입는 티와 바지를 준섭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표정은 그 특유의 뚱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준섭은 감사하다 몇 번이고 말하며 그가 준 수건과 옷들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몸에 달라붙은 젖은 옷들을 벗고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낸 다음, 그가 준 옷을 입고 화장실서 나왔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고, 자 이거.”
화장실서 나오기 무섭게 대만은 준섭에게 제 지갑서 미리 빼둔 돈을 내밀었다. 해남고 주변에 사는 걸 감안한 건지 택시비치곤 꽤 많은 2만원이 들려져 있는 손을 보고 준섭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외견과 달리 의외로 섬세하고, 의외로 친절한 사람이다. 선뜻 받아들기가 어려워 준섭이 머뭇거리자 대만은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지은채로 조용히 손에 쥐어주었다.
“집에는 가야 될 거 아냐, 여기서 잘 생각이냐?”
“당연히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택시비까지 주시니까….”
“갚으면 되잖아. 잠깐… 주다니? 야, 너 안 갚을 생각이었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꼭 갚으라며 으름장을 놓는 대만의 모습에 준섭은 웃으면서 꼭 갚겠다고 약속하고 현관으로 발을 옮겼다. 조금 쉬고 가도 된다고 권하는 대만의 말을 정중히 거절하며 준섭은 신발을 신다가 제 발목에 조금 못 미치는 바지를 보고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정대만은 자신보다 조금 작았다. 슬쩍 보니 빌려준 긴 팔도 소매가 손목에 채 미치질 못하고 있었다. 그의 체구가 자신보다 조금 작다는 걸 새삼 느끼며 준섭은 신발을 마저 다 신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우산은 그 노란 우산을 써.”
“아, 이거요?”
“응, 그거.”
아까 자신을 씌어줬던 우산이었다. 아직 물기가 남은 우산을 들자 우산 표면에 작은 노란 병아리들이 그려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귀여운 우산이네. 병아리를 쳐다보던 준섭은 저도 모르게 대만을 쳐다보았다. 어딘가 묘하게 닮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병아리 치곤 좀 표정이 많이 뚱하지만.
“…내, 내거 아니다. 사촌 동생이 두고 간거야.”
“아, 그, 그런 뜻으로 본 게 아니었어요.”
“…어, 어쨌든 내껀 아니야. 큼, 다음에 보자.”
“예, 다음에 옷하고 돈 돌려드리러 북산에 갈께요.”
예절바르게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준섭은 현관을 나서며 그 몰래 웃었다. 아, 심장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해. 현관문을 닫고 우산을 피기 전 그는 다시 한번 우산에 그려진 병아리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와 닮아있었다.
분명 우산의 주인은 정대만 본인일거라고 생각하며 준섭은 조용히 웃었다.
++++
밖에 비가 와서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삘받아서 쓴 대만이와 준섭이.
대만이는 거의 말도 안해본 해남의 슈터에게 매우 제 후배 대하듯 하고, 준섭이도 이상하게 그거에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좀..이상하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내 최애커플 준서비와 대마니의 첫 만남(????????)을 생각하며 써본 글!
준서비는 이때 대마니에게 완전 빠지게 돼서 결국 ‘스토커 신준섭’이 됩니다.(틀림)